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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3.08 | 조회수 : 11543

제목 : 프랑스 : 문화의 이름으로 동서양을 비교해볼까?(이상빈) 글쓴이 : 전략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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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칠레와의 FTA 체결 시 우리의 문제점들이 여실히 드러났지만, 프랑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문제이고, 서로 주고받는 것에 따라 어떤 실익과 손해가 있으며, 따라서 현재 모습이 향후 어떤 전략과도 연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망의 부재가 거의 위험수준을 넘어선 느낌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상빈(한국외대 불어과 대우교수 프랑스 파리제8대학 문학박사) 1월 19일 동아일보는 “문화산업이 곧 문화인가?”이라는 제목 하에 대학로포럼 연구위원인 목 수정 씨의 글을 게재하고 있다. 그는 2002년 12월 당시 영화감독이었던 이 창동 씨가 영화 ‘오아시스’를 들고 파리 가을축제를 찾은 모습과, 2003년 12월 이번에는 문화관광부 장관인 이 창동 씨가 21세기를 ‘콘텐츠의 세기’로 규정하고 2008년까지 우리나라를 ‘세계 5대 문화산업 강국’에 진입시키기 위한 정책비전을 제시하는 모습을 오버랩 시키면서 ‘문화’와 ‘문화산업’을 혼동하는 관료들의 오류와 무감각을 꼬집고 있다. 모든 것을 시장화해 버리는 신자유경제주의의 완벽한 승리에 대해서도 박수를 보내면서. 문화가 근본적으로 정신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에 자유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는 논리는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터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문화를 돈의 논리에 종속시키려는 시도가 왜 계속되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 사회의 배금주의가 가장 주된 장본인일 것이다. 허나 이런 논리의 이면에는 문화가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행복지수의 확대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알게 모르게 프랑스의 명품들, 프랑스의 ‘웰빙’ 상품들, 식도락을 즐길 수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들이 우리 주변에 무수히 깔려있지만 프랑스에서 현재진행형인 문화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과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의 모든 공연들 중 오페라 관람료가 가장 비싸고, 그 가격은 114유로(약15만원)부터 10유로(약1만4천원)까지 다양하다. 가격만 놓고 볼 때 가난한 자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한국의 방식과 천양지차이다. 게다가 질적인 차원에서도 차이가 난다. 그마저도 여유가 없는 사람은 공연 1시간 전까지 버티면 된다. 파리에서 매일 열리는 공연의 숫자가 대단히 많고 각 공연장이 만원사례를 이루는 경우가 거의 없기에, 대부분의 공연장은 공연 시작 1시간 전부터 정가의 반값에 티켓을 판매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를 즐길 기회가 골고루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문화는 분명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지향한다. 그러기에 “돈이 돈을 낳는다”는 우리네 방식, “비싼 공연을 봐야 남과 차별화 된다”는 우리 식의 논리는 프랑스에서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 거리의 낙서도 하나의 예술로 인정하고, 대학에서 관련학과가 개설되는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1999년 11월 칼렉스, 가스파르, 브루노라는 무명의 세 미술가가 리볼리가 59번지의 폐쇄된 건물을 무단 점거한 후 ‘자유로운 예술 공간’을 선포하고, 이듬해 이 건물이 25명의 예술가들이 마음대로 작업하고 전시하는 활기찬 장소로 탈바꿈되면서 ‘로베르네 집’, ‘자유전자(自由電子?Electron Libre)’라는 별칭을 얻은 사실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피에르 신부나 코미디언 콜리슈, 해양탐사에 일생을 바친 쿠스토 선장, 축구선수 지단이 프랑스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인물들 선두에 포진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면 형이상학적 차이로까지 규정할 수 있는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진다. 아마 그런 모습에서 상당 부분 오해도 비롯될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일본의 극우지식인으로 간주하면서 문학마저 평가 절하하는 유키오 미시마(Yukio Mishima, 三島由紀夫)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투우가 그렇듯, 그의 할복이 광기와 비장미를 동시에 불러일으켰기 때문일까? 아니면 앙드레 말로가 미시마에 대해 표시한 애정 때문일까? 중국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표현들이 발견된다. 보들레르는 중국인들을 ‘화석과 같은 존재’에 빗대고 있다. 이 경우 ‘화석’이란 수억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아니 변할 줄 모르는 존재를 비꼬는 개념이다. 서구사회를 지탱해온 진보의 개념에 비추어볼 때, 아시아인들은 이미 예속을 전제로 하는 인간들이지 않은가? 앙드레 말로의 ?반회상록(反回想錄)? 속에서는, 옛날 아시아로 떠난다는 사실이 영겁(永劫)을 거슬러 올라가 전혀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감을 뜻했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차이는 종종 세계관의 차이, 가치 판단의 차이, 사물 인식의 차이 등을 낳는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데카르트적 사유방식’은 질문을 통해 사물의 핵심까지 파고 들어가는 방식이다. 당연히 이 방식은 사물의 이치를 ‘합리적으로’ 따져보게 만들며, 그런 방식에 따라 의혹은 ‘단계별로’ 해소된다. 우리는 어떤가? 사회적 통합이 유교적 질서라는 이름으로 구축될 때 합리성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합리성은 사회의 화합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동일한 접근방식이 문화에도 적용된다. 명품이 차이를 낳는다면, 우리는 그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획일적인 사회에서는 어떻게든 최소한의 구분이라도 짓고싶어하니까. 프랑스 사회의 기본틀을 분석해보면 ‘차고 넘치는’ 다양성을 모두 수용할 수밖에 없으니까 ‘다양성(바리에테)’의 개념이 먼저 오고, 그들끼리 조화롭게 살게하기 위한 ‘관용(톨레랑스)’의 개념이 뒤따라온다. 오히려 우리가 보들레르의 표현을 뒤집어 프랑스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화석 같은 존재들이다. 무려 50년 전의 전화번호가 아직도 바뀌지 않는다. 샹젤리제의 거리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들은 과학과 기술문명의 진보를 끔찍하게 두려워한다. 매일 라디오를 청취하는 비율은 아직도 지극히 높으며,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율은 한국보다 훨씬 뒤진다. 역사를 먹고사는 존재들이기에 기억, 망각에 대한 논의가 남다르고, 일년 내내 위인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기념하기에 바쁘며, 따라서 과거로부터 빠져나오기가 너무도 힘든 존재들이다. 이미 1백년 전에 정리된 정교분리 원칙이 항상 등장하면서 갈등을 낳고 있으며, ‘히잡 사건’을 통해서도 익히 알고있듯이 이슬람에 대한 차별이 분명히 존재하는 사회이다. 엄밀히 따져볼 때 왜 이슬람만 ‘히잡’을 착용할 수 없는가?” 이런 차이는 우리의 대(對) 프랑스 외교에도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단언하자면, 프랑스에 대해 가장 유효한 접근방식은 역시 문화를 통해서이다. 프랑스는 이 점에서 대단히 전략적이다. 일본과 중국의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는 올해를 ‘중국의 해’로 지정하면서, 금번 설날을 맞아 샹젤리제 거리에서 대대적인 중국 축제를 벌였다. 퐁텐블로 성, 혹은 모네의 그림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마르모탕 박물관에 들러보면 건물의 개보수에 재정적으로 기여한 일본인들의 이름이 꼭 들어가 있다.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광만큼이나, 프랑스도 일본과 일본인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수년 전 세느 강변에 오픈한 일본문화센터의 거대한 규모도 우리의 초라한 ‘파리 한국문화원’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칠레와의 FTA 체결 시 우리의 문제점들이 여실히 드러났지만, 프랑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문제이고, 서로 주고받는 것에 따라 어떤 실익과 손해가 있으며, 따라서 현재 모습이 향후 어떤 전략과도 연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망의 부재가 거의 위험수준을 넘어선 느낌이다. 프랑스인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방식들을 모색해볼까? 한국기업들은 이 문열, 황 석영의 작품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는 ‘악트 쉬드(Actes Sud)’를 재정 지원하라. 또 한국 영화들을 프랑스에 소개하는데 적극적인 낭트 영화제, 도빌 영화제 등을 측면 지원하라. 정부는 한국 문인과 예술가들의 프랑스 내 소개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도록 정기적인 행사를 강구하라. 한국 음악인들은 한국의 궁중음악과 프랑스의 바로크 음악을 연계시킨 행사들에 착안해 보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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