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86590
작성일 : 04.06.17 | 조회수 : 7596
제목 : 포도주는 시간의 효율적인 장치 | 글쓴이 : 전략홍보팀 |
![]() |
|
![]() 김정하(한국외대 EU연구소 교수/ 이탈리아 시에나 국립대 역사학 박사) 포도주는 시간의 가장 효율적인 장치이다. 그리고 과거의 비밀들은 우리의 미래에 그늘을 드리운다. 상당히 희귀한 병들 중에는 기억증진성 알콜중독(stilismo mnemonico)이라는 것이 있다. 이 병은 알코올을 섭취한 결과로 기억력이 증진되는 증세를 보인다. 간단히 말해 다른 사람들은 잊기 위해서 마시지만, 이 환자는 기억하기 위해 포도주를 마시는 셈이다. 브리스(Briss)는 자신이 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어느 날 바에서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브리스는 전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술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해서도 기억을 쉽고 신속하게 잊어버리곤 하였다. 그의 주량은 최대 포도주 한잔이었다. 그럼에도 불과 한 모금의 포도주에 성난 부인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으며 그 강도가 더욱 심해져 갔다. 바르베로(Barbero) 포도주 한 잔으로 자신의 분노를 삭이려 했던 브리스의 시도는 피하고만 싶던 부인의 모습이 머리 속에 또다시 각인됨으로써 여지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더구나 이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계속해서 오만상의 얼굴로 으르렁대던 순간의 기억들이 눈앞에 스쳐가면서 급기야는 3차원의 입체영상으로 격렬한 장면들이 눈앞에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별 일이 아니며 증상이 심각하지 않다고 하였지만,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불치의 증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분노를 삭혀주거나 살아온 즐거운 순간을 재현하기 위한 효율적인 명분이기도 하기 때문이??. 긍정적인 측면 이처럼 포도주는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덕목이기도 하다. 불행은 훌륭한 사고를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병은 스스로 관심 없어 하는 미래의 동기가 아니라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재생하기 위한 중요한 재원이라고 할 것이다. 만약 불과 한 모금의 포도주가 몇 시간 전의 기억으로 그를 되돌려 놓았다면 한 컵의 분량은 어떤 효과를 가져오겠는가? 더구나 그 양이 한 병에 이른다면. 그럼 종이와 펜 그리고 수학적 정량에 대한 지식을 동원해서 우리의 행복한 날들, 즉 박사학위취득, 승진, 자식의 출생 그리고 혼인 등에 따른 밀리리터(ml)의 비율을 지적해보자. 대략 포도주 반병의 분량은 과거의 어느 시기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포함할 수 있는 스폰지와 같은 효과를 낸다. 감격스런 마음과 약간의 떨림으로 시작하는 것은 별로 포도주와 친근한 관계의 시작은 아니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같은 순간에 상당히 불쾌해지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면 포도주를 그만 마시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과거로의 첫 몰두는 상당히 좋은 기분이다. 45 밀리리터를 마신 상태에서는 흰옷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과 나란히 밀착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첫 아들의 탄생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42 밀리리터로 충분한 반면, 회장이나 의장의 집무실에 들어가서 승진의 통지서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47 밀리리터로 그 양이 증가하며 51 밀리리터로는 촉망받는 박사로, 53 밀리리터로는 첫날밤의 취기로 돌아갈 수 있다. 삶의 흔적들을 되돌아 보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심할 것은 이러한 기술이 단지 오락의 범주에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이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통해 포도주는 상당히 효율적이며 아직까지도 매우 안전한 시간의 기계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효과는 포도주의 양에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비례한다. 그러나 실제로 품질과 가격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어쨌든 마신 량이 53 밀리리터를 넘어가면서 브리스(Briss)는 서서히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첫 번째 절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태로 그는 계속해서 포도주를 마시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술에 완전히 도취한 상태로 끝까지 술병을 비우려 고집하였다. 그리고 그 집착의 결과는 끔찍하였다. 과거의 안개가 거치면서 잘 알 수는 없지만, 갑작스럽게 슬프고 헐벗은 농부들이 빈약한 쟁기로 쟁기질을 하고 있는 들판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러한 장면들 속에서 브리스는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브리스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마을의 중심거리에서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 길을 따라 수백 미터를 걸으면서 좌우에 위치한 수많은 집들의 대문들 그리고 그 곁에 매달려 희미한 불빛으로 거리를 밝히고 있는 기름 등잔들을 목격하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전방 얼마 떨어진 골목어귀에 불과 몇 개의 탁자들, 그것도 변변한 의자들도 없는 허름한 술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떨어질 듯 붙어있는 쪽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한쪽 귀퉁이 조그만 탁자에 빛 바랜 글씨들로 희미한 회색 빛만을 드러내고 있는 신문 쪼가리가 보였다. 큰 제목의 옆구리부분에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었다: 1823년 1월 15일. 마치 광기의 취기로 혼이 난 직후 머리 속을 휩쓸고 간 악몽의 기억들... 한 편의 몹쓸 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이미지가 모두 헛된 것이었다는 별로 반갑지 않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친구는 계속해서 술을 마시려고 하였다. 오히려 이번에는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의 정경을 보려고 고집하였다. 물론 그의 잘못만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눈으로 포도주의 양을 정확하게 측정하려고 하면서 다른 한 눈으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기록된 천년의 날짜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오래 전 시골 마을에 찾아오던 야외무대의 낭만이라 할 것이다. 그는 포도주를 통해 위대한 역사의 순간들을 목격하려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 정상적인 사람들과 처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수많은 증언을 경청하려고 하였다. 계속해서 과거를 향해 이제는 마시는 술의 품질을 무시한 채, 위스키를 마시려고 하였다. 독한 술이었던 만큼 7밀리리터를 마신 후에는 워터루의 포성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14 밀리리터를 마신 다음에는 밀라노에 입성한 나폴레옹이 한 눈에 보였다. 19 밀리리터에는 당통(Danton)의 잘린 머리를 보았고 조금 더 마신 후에는 7월 4일에 조지 워싱턴이 자신의 옆에 앉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32 밀리리터에 이르자 성 카를로 보로메오(Carlo Borromeo)를, 46 밀리리터에는 마르틴 루터와 수다를 떨고 있는 자신을 그리고 50 밀리리터를 넘어가자 콜롬부스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내딛고 있었다. 이후 계속해서 터어키의 서방공세, 십자군, 위대한 11세기의 절정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성립을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기간에 예술과 민속의 재흥을 경험하였다. 과거의 주인 이번에는 위스키에서 도수가 50도를 상회하는 그라파(Grappa)로 바꾸었다. 용기를 내서 마지막 시간이동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다지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한 마시는 술의 양을 측정하지 않은 채 그냥 들어가는 대로 마시기 시작하였다. 중요한 것은 고대(古代)로의 끈을 잡는 것이었고 다행히 과거의 연속성에 안착하는 데 성공하였다. 과거의 술잔으로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거대한 시간괴물처럼 사건들을 마셔대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브리스는 역사책의 로마와는 아무런 유사점이 보이지 않는 근대의 기술시대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 어떤 거대한 휘장도, 군대도, 황제의 광장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양복, 넥타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고층빌딩들. 이러한 모습에 놀란 우리의 브리스는 자신이 20세기에 와 있다고 믿고 있었다. 태양이 그 햇살을 지상에 쏟아 붙고 있는 어느 오후 미래의 전차들, 축제에 들뜬 군중들이 환호하고 수많은 시대의 특징들에 둘러싸인 무기들. 이 모든 것들이 거대한 도로의 구석구석을 메우고 있었다. 하늘에는 곡예비행단의 시범묘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군인들은 거대한 청동의 아치를 당당한 모습으로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치의 상단에는 “COSTANTINO OPTIMO MAXIMO SENATVS POPVLVSQVE ROMANVS DICAVERVNT”라는 구절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뒤에서 위대한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당당한 모습으로 군인들의 사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글 | 유럽연합의 확대, 기회인가 위기인가? |
---|---|
이전글 | 아르헨티나 수출의 운명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