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86585
작성일 : 04.03.08 | 조회수 : 8630
제목 : 노블리스 오블리지와 미국(김형인) | 글쓴이 : 전략홍보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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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인 요약 : 미국에서는 많은 기업가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을 들면 카네기이다. 요즈음 노블리스 오블리지(nobelesse oblige)라는 말이 자주 세간에 화두로 떠오른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정치적 사회적 부패 속에서 늘어가는 검은 돈다발의 부피만큼이나 점점 빈부의 격차가 우리나라에서 심화되고 있다고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커머셜 마인드로 완전무장한 기업들은 아름답거나 자극적인 영상미가 그득한 광고로 “당신도 귀족의 소비문화권으로 들어오세요! 이 물건과 주거공간 아니면 놀이공간을 써보기만 하면돼요” 라고 유혹한다. 이렇게 소비문화는 우리에게 어떤 물건을 사용하면 당신도 귀족스럽게 될 수 있다는 시대착오적인 착각을 강매하고 있다. 여러 가지 상품의 배후에 슬쩍 음험하게 첨부되는 귀족의 이미지는 이제 우리 주위에 지나치게 범람하여서, 우리는 이제 자연스럽게 타인과는 품위 면에서 차별화를 하고 싶은 물질적 귀족문화에 이미 깊이 감염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사회봉사나 나눔의 행위에도 결국 시대착오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지’라는 '귀족적?'어휘를 붙여 기부문화마저 그릇된 분위기로 포장하려는 듯싶다. ‘노블리스 오블리지’란 ‘귀족의 의무’라는 말로서 번역될 수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것은 1830-40년대 경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말인 것 같다. 당시 그곳은 혁명이 너무 과격하게 변질되어버려 공포정치를 경험하고 다시 옛것을 찾아 왕정복고의 길로 들어선 시대적 상황에 있었다. 그러니 귀족들에게도 사회적 의식이 어느정도 배태되던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시기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자는 박애주의(philanthropy)가 새롭게 떠오르던 시기였다. 사실 이 프랑스 복합어가 건네주는 참 뜻은 보다 많이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베풀라는,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한 개념이다. 그러나 그 어휘는 앙샹레짐의 시대착오적인 냄새가 너무 많이 풍긴다. 그래서 미국적 감각으로 보면 어색한 어휘이다. 미국인들은 오히려 이런 사회봉사를 하는 사람에 대해 그/그녀는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이 있다던가 ‘사회적 의식’ (social consciousness)이 있다라는 말을 즐겨 쓴다. 우리의 전통문화에도 길손을 결코 굶겨서 보내지 않는 양반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가 있었고, 이것과는 좀 틀리지만 선비정신 같은 것도 있다. 선비정신은 스스로를 봐도 부끄러움이 없는 윤리를 요구하고 청빈낙도하는 정신을 찬양한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나 금욕적인 부분이 덜 강조되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지는 물질적 베품의 뜻을 더 강하게 갖고있다. 결국 ‘노블리스 오블리지’라는 말은 ‘노블’ 이라고 불리는 귀족이 존재함을 전제로 하고야 가능하다. 그러나 혈통적 귀족을 부정하는 미국에서는 이 단어 대신에 셀레브리티(celebrity)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이들은 무엇인가 자신 스스로의 능력으로 세인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다. 미국에서는 많은 셀레브리티가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람을 들면 카네기(Andriew Carnegie)이고, 요즈음 가장 대표적 인물은 빌 게이츠(William Gates)이다. 카네기 카네기는 1835년에 스코트란드에서 12세에 미국으로 그의 가족들과 함께 이민왔다. 그의 아버지는 방적 기술공이었는데 증기기관 기계가 들어오자 대량실업을 맞아서, 이민의 길에 올랐으며 피츠버그에 정착했다. 어린 카네기는 방직공장에서 실패나 증기기관을 관리하였는데, 글씨를 잘썼기 때문에 공장의 사무원으로 발탁되었다. 그후 전보회사로 옮겼다가 18세에 펜실바니아 철도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 철도의 서부지역 감독인 토마스 스코트의 비서로 일하면서 철도 업무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을 익혔다. 그가 20세 되던 해에 그의 부친이 돌아가시게 되자 그는 집안의 생계를 도맡아 꾸려가게 되었다. 다음 해에 카네기는 은행에서 대부받아서 한 침대차 회사에 217.50 달러를 투자하였는데, 그것이 성공적이어서 2년 후 그 회사로부터 매년 5000 달러의 배당금을 받았다. 그것은 그의 월급보다 3배가 많은 액수였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서부지역의 감독으로 승진 되었고 어머니와 교외의 좋은 집에서 이사하여 살게되었다. 남북전쟁 때 그는 북군으로 입대하였으나, 전쟁 중에도 계속 철도회사에 근무하면서 그의 투자를 정유와 송유관 사업 등으로 확장하며 재산을 증식하였다. 1865년 그는 철도회사를 사임하고 철도회사의 동료들과 Keystone Bridge Co.를 세워서 펜실바니아 철도라인에 전보케이블을 설치하는 사업을 하였는데, 이것은 전국의 전보망을 잇는 회사로 발전하였다. 1968년인 35세 때 그는 사업에서 은퇴하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는 1년에 5만 달러의 수입으로 만족하며 나머지 생애를 박애주의적 일을 하면서 공부를 더 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두해 뒤에 거상의 딸인 Louise Whitfield를 만난다. 이들은 15년 뒤 카네기가 52세 되던 해에 또 루이즈가 36세 되던 해에 결혼하여, 10년 후에 딸 Margaret를 낳는다. 그러나 1872년에 카네기가 영국에서 베스너(Henry Bessner) 강철공장을 방문하고 돌아오자 그는 이공법으로 Freedom Iron Co.를 확대하여 강철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Edgar Thomson 공장을 세워서 기차철로를 생산하였다. 그동안 카네기는 코카콜라에 투자하였는데 점차 그회사의 Henry Clay Frick과 합자를 하였다. 그리고 1883년에는 그의 경쟁사였던 Homestead 강철공장을 매입하였다. 1889년에 카네기는 Gospel of Wealth를 집필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부유한자들은 사회의 공복으로 일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음해에 카네기의 1년 수입은 2,500만 달러에 달했다. 카네기는 근본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1892년 홈스테드 공장에서 노조가입이 만기되면서 파업이 일어났을 때 그는 유럽으로 여행 중이었다. 카네기는 파업사태의 수습을 Frick에게 맡겼으나, 이 사건은 잘 조정되지 못하고 미국에서 최악의 노조파업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프릭은 파업파괴자들을 고용하였으나 파업을 막지 못하고, 그들 중 20명이 노조원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여 결국 주방위군이 공장에 투입되어 수습되었다. 이 사건은 노동자의 친구라고 여겨졌던 카네기의 신망에 먹칠을 하였다. 카네기는 스코트란드에서 구입한 Skibo Castle에서 한적한 생활을 보내며 박애주의활동을 확대하였다. 그는 필리핀의 독립을 지원하면서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2,000만 달러를 주고 매입하려하자, 필리핀에 그만한 금액을 독립자금으로 지원하려하였다. 카네기의 공장에서는 이제 완제품의 철강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이로서 카네기는 그 업종에 종사하던 J. P. Morgan의 경쟁 상대가 되었다. 카네기는 1899년에 카네기 철강공장을 세워서 연간 4,000만 달러의 실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Carnegie Institute of Technology를 수립했다. 190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카네기의 사회사업이 시작되는 데, 이것은 카네기가 모건에게 그의 강철공장을 4,800만 달러에 팔면서 시작된다. 모건은 그 결과 U. S. Steel회사를 세웠고 카네기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그 다음해 그는 Carnegie Institute를 세워서 미국 대학에서의 연구활동을 지원했다. Carnegie Teachers' Pension Fund는 그보다 3년 뒤에 수립되었는데, 이를 위해 그는 1,000만 달러를 투여했다. 1910년에는 Carnegie Endowment of International Peace를 수립하였고, 코스타리카에 Cenral American Court of Justice in Costa Rica를 세웠으나 다음해에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그리고 1911년에는 그가 남아있는 재산 1억2,500만 달러를 털어서 Carnegie Corporation을 수립한다. 그는 이 회사가 대학, 기술학교, 과학연구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사회사업이었다. 그는 그의 전재산의 90%를 사회에 환원하였던 것이다. 카네기는 국외에서도 복지사업을 하였다. 그는 1913년 헤이그에 The Temple of Peace를 수립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교육할 기회를 가져야한다고 믿으면서 미국을 포함한 영어권 지역에 총 2,509개 소의 도서관을 세웠다. 그는 1916년에 매사추세츠의 Shadowbrook에 한 저택을 매입하여 살다가 거기에서 3년후 84세의 일기를 마지막으로 사망했다. 이렇게 카네기는 부유한 자들에게 맡겨진 사회적 임무를 다한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었다. 빌 게이츠도 카네기 같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서 2,000년에 The Bill & Melinda Foundation을 세워 교육과 건강증진을 위한 사회사업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서술하기로 한다. |